거창군 가조면은 군의 동부를 이루며 합천군의 서북부와 맞닿고 높은 산줄기에 둘러쌓인큰 분지이다. 옛날 가소(加召)라는 성읍국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신라시대에는 가소현, 함음현이라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가소현, 거제현이라 하다가 조선시대초에 제창현이라 하다가 거창현에 합쳐졌다. 우두봉의상봉 아래 견암폭포가 있으며, 가조면 수월리우두산(牛頭山)에 있는 사찰, 견암사(고견사)는 신라 애장왕때 창건한 사찰로, 조선초 국가에서 주도하는 수륙재(水陸齋)를 행하였다. 또한 려말선초 150년간 거제도에서 피난 온 거제현민의 땅이기도하다.
경남 거창군 동부에 있는 가조면은 사방이 박유산(713m)·이상봉(1,046m)·오도산(1,134m) 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중앙부에는 가천을 중심으로평야가 발달한 분지 형태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뽕나무밭이 많아 누에고치 생산량이 군내에서 가장 많다. 일부리와 석강리에는 농공단지가 입지해 있으며, 가조온천과 백두산천지온천을중심으로 관광지가 조성되어 있다.
광주와 대구를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면 중부를 동서로 관통하며, 국도 1084호선과 1099호선이경유한다. 행정구역은 마상리·기리·대초리·동례리·장기리·사병리·석강리·수월리·일부리·도리 등 10개리가 있다(법정리 기준, 행정리기준 32개리). 면소재지는 거창군 가조면 장군봉1길이다. 면적 66.15㎢, 인구 3,987명(2016년)이다.
35) 가조현에서 자다[宿加祚縣] / 김종직(金宗直 1431∼1492) 가조현은 거창(居昌)의 속현(屬縣)인데, 고려시대삼별초(三別抄)의 난이 있을 때에 거제(巨濟)의 이민(吏民)들이 바다를 건너 이곳에 도망쳐 와서 부쳐살았다. 그러다가 본조(本朝) 초기에 와서는 그들이 옛 고장으로 돌아갔는데, 지금도 이 고을을 거제라 부르고 있고, 또 마을 이름도 아직까지아주(鵝洲)ㆍ송변(松邊)ㆍ오양(烏攘) 등의 칭호를 띠고 있다.(縣屬居昌高麗三別抄之亂巨濟吏民渡海奔逬于此遂僑寓焉本朝初還其舊土至今號此縣爲巨濟又村名尙帶鵝洲松邊烏攘等稱).
桑柘人居密 농사 짓는 사람이 빽빽히 사는데 空留海島名 공연히 섬의 명칭이 남아있구려 溪山共隱逸 계산은 은거한 선비들과 함께하고 父老說升平 부로들은 태평 성대를 말하네 夜靜豚鳴圈 고요한 밤엔 우리에서 돼지가 울고 簷虛月到楹 텅 빈 처마엔 달이 기둥을 비추누나 酒醒仍喚燭 술이 깨자 촛불을 부르고 보니 方信俗塵縈 이제야 속진에 얽혔음을 믿겠네
[주] 고려시대 거제현은 거제도 본섬에서 거제관청을 1272년부터 1422년까지 약150년간거창군 가조면에서 더부살이 했다. 진주 거창 등지로, 관아관계자와 관노 등 약1000 명 정도가 피난 왔다가 조선초 세종 때 되돌아간 역사가 있었다.
回轉山高日易斜 높은 산을 돌아오니 태양이 기우는데 馬頭隨處水聲多 역마 길 따라 가는 곳마다 물소리가 우렁차다. 紅葉滿蹊村大吠 붉은 단풍이 좁은 길에 가득한데 마을 개 짓는 소리와 隔林人語是誰家 수풀 너머의 사람 말소리 그 뉘 집이더냐
37) 이희인(학연) 만사[挽李希仁學淵] / 곽종석(郭鍾錫 1846∼1919)
文獻翹英鍾世胎 문헌에 걸출한 인재는 거듭 세대를 이어오니 風標孤直認天栽 풍채가 올곧고 하늘에서 내린 분이었다. 寰中玉立塵誰浼 세상의 곧은 절개를 속세에서누가 더럽혔나? 座上春回凍欲開 덕(德)이 봄날처럼 온화하게 돌아와 추위에서 피우려하네. 泉舍寒花期晩節 샘물 집안에 겨울 꽃이 늦은 계절을 기약하니 泡臺晴瀑動離哀 수포대의 맑은 폭포가 이별의 슬픔을 일으키네.
희인(希仁)이 가조에 우거하고 있었다. 용천(龍泉)에서 만화계(晩花契)모임 일로 함께 모였는데 고향으로 돌아가 머물렀다. 나와 더불어 계회원 여러 공들과 수포대에서 송별하였다.(希仁之寓加祚也同修晩花契事於龍泉逮其還鄕吾與契中諸公送別於水泡臺)
雲飛杳杳今何處 구름이 아득히 날아갔으니 지금 어디쯤일까? 霄漢同舟未可涯 하늘의 은하수에서 배를 타더라도 물가라 할 수 없어라.
[주1] 이학연(李學淵) : 가조면에 우거하고 있던 이학연은 자는 희인(希仁)이다. 병자년(1876) 초에최익현(崔益鉉)·장호근(張皓根) 등과 위정척사운동을 주장하며 임금께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주2] 좌상춘(座上春) : 정호(程顥)의 제자 유정부(游定夫)가 선생이 있던 곳으로부터 와서 양구산(楊龜山)을 방문했을 때 양구산이 그 온 곳을 묻자, 유정부가 말하기를 “봄바람의온화한 기운 가운데 석 달 동안 앉았다가 왔다.”라고 대답하였다.